서경호 교육위원회 위원장(자유전공학부 교수)
눈에 띄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일부 대기업에서 임원 인사에서 공과대학의 특정학과 출신이 CEO로 발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대기업의 임원 인사가 기사화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기사는 조금 특수했다. 왜냐하면 승진한 사람들의 출신 학과에 초점이 모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에 따르면 이 학과는 ‘박쥐’, ‘공대의 서자(庶子)’로 불려왔는데, 최근 대기업 인사에서 이 학과 출신의 인사들이 약진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직 CEO 중에서 이 학과 출신이 많으며, 애플을 이끌고 있는 팀 쿡도 같은 이름을 가진 학과 출신이라고 한다. 기사에서는 최근 산업계의 흐름이 융합으로 돌아서면서 "공학·과학적 지식에 경영 기법을 접목해 다양한 산업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 이라는 학과장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배출하는 것에 비유했다.
보도가 나간 후 학과장이 축하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내 기분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박쥐나 서자와 같은 별명이 내포하는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축복받으면서 태어나듯 모든 학문 분야도 미래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수요가 나타나는 미래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심지어 우리 학계에서도 가까운 미래를 적자로, 먼 미래를 서자로 취급해 왔다. 즉각적인 수요가 있는 분야는 백조가 되고 아직 수요가 불투명한 분야는 박쥐가 되었다. 이번 기사를 보면 박쥐가 백조를 상대로 통렬한 복수극을 벌인 셈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 복수극이 마냥 통쾌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만약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몇 년 일찍 우리 대학에도 닥쳐왔다면 이 기사에서 언급된 학과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게 되었다면 미래의 나무가 될 싹을 싹둑 잘라버린 꼴이 되었을 것이다.
백조와 박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대학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분야는 백조가 된다. 박쥐 학생들이 백조를 복수전공하거나 부전공할 때에는 서자 취급을 받는다. 수강신청을 제한하기도 하고 각종 프로그램의 참여도 제한된다. 그것은 제도적인 차별일 뿐만 아니라 차별 의식의 산물이다. 그것이 구태(舊態)임은 분명하다. 굳이 홍길동의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것은 과거의 유물이다. 그런데 대학은 미래를 선도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대학 밖에서는 창의와 혁신을 통해 미래를 선도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전공분야 사이의 장벽을 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대학 내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이 활개치고 있다. 각종 행사에서, 또 총장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으로서의 서울대’라는 구호를 듣는다.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구태와 의식이 대학 사회를 지배하는 한 그런 구호는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서경호 교육위원회 위원장
(자유전공학부 교수)
눈에 띄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일부 대기업에서 임원 인사에서 공과대학의 특정학과 출신이 CEO로 발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대기업의 임원 인사가 기사화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기사는 조금 특수했다. 왜냐하면 승진한 사람들의 출신 학과에 초점이 모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에 따르면 이 학과는 ‘박쥐’, ‘공대의 서자(庶子)’로 불려왔는데, 최근 대기업 인사에서 이 학과 출신의 인사들이 약진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직 CEO 중에서 이 학과 출신이 많으며, 애플을 이끌고 있는 팀 쿡도 같은 이름을 가진 학과 출신이라고 한다. 기사에서는 최근 산업계의 흐름이 융합으로 돌아서면서 "공학·과학적 지식에 경영 기법을 접목해 다양한 산업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 이라는 학과장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배출하는 것에 비유했다.
보도가 나간 후 학과장이 축하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내 기분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박쥐나 서자와 같은 별명이 내포하는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축복받으면서 태어나듯 모든 학문 분야도 미래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수요가 나타나는 미래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심지어 우리 학계에서도 가까운 미래를 적자로, 먼 미래를 서자로 취급해 왔다. 즉각적인 수요가 있는 분야는 백조가 되고 아직 수요가 불투명한 분야는 박쥐가 되었다. 이번 기사를 보면 박쥐가 백조를 상대로 통렬한 복수극을 벌인 셈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 복수극이 마냥 통쾌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만약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몇 년 일찍 우리 대학에도 닥쳐왔다면 이 기사에서 언급된 학과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게 되었다면 미래의 나무가 될 싹을 싹둑 잘라버린 꼴이 되었을 것이다.
백조와 박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대학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분야는 백조가 된다. 박쥐 학생들이 백조를 복수전공하거나 부전공할 때에는 서자 취급을 받는다. 수강신청을 제한하기도 하고 각종 프로그램의 참여도 제한된다. 그것은 제도적인 차별일 뿐만 아니라 차별 의식의 산물이다. 그것이 구태(舊態)임은 분명하다. 굳이 홍길동의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것은 과거의 유물이다. 그런데 대학은 미래를 선도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대학 밖에서는 창의와 혁신을 통해 미래를 선도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전공분야 사이의 장벽을 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대학 내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이 활개치고 있다. 각종 행사에서, 또 총장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으로서의 서울대’라는 구호를 듣는다.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구태와 의식이 대학 사회를 지배하는 한 그런 구호는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